100여명이 훌쩍 넘는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있다. 단상 앞에 선 강사의 목소리는 학생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수년째 들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라서다.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예방교육의 민낯이다. 그래서 김일숙 이사장은 2017년 강사협동조합 ‘세움’을 설립했다. “한번을 교육하더라도 제대로 된 방식으로 하자”는 취지에서였다.
2015년 8월, 청소년 자살예방교육 강사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1년여간 96개 학교를 돌았다. 뜻깊은 시간이었다. 의미 있는 일이었기에 힘든지도 몰랐다. 하지만 보람을 느끼는 것도 잠시. 학생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냉정했다. “지루하다” “내용이 뻔하다” “이런다고 자살률이 얼마나 줄어들까”….
당연한 결과였다. 학생들에겐 해마다 반복되는 뻔한 내용의 교육이었다. 일방향으로 진행하는 강당식 교육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길 바랄 수 없었고, 강사가 주도하는 교육 방식에 학생들이 공감할 리도 없었다.
기존 강당식 교육 방식은 한계가 분명했다.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교육법이 필요했다.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건 김일숙(58) 이사장만이 아니었다. 마음이 맞는 강사들이 뜻을 모았고, 강사협동조합 세움은 그렇게 탄생했다.
김 이사장이 생각하기에 청소년 자살예방교육의 시작은 소통이었다. 학생들 스스로 소통을 통해 감정을 들여다보고, 분노를 끄집어내고, 가치를 찾아내고, 자존감을 높이는 과정이 수반돼야 한다고 믿었다.
세움의 독특한 교육 방법도 여기서 출발했다. 세움이 직접 만든 교구를 사용하는데, 흡사 게임과 같다. 질문카드 20장과 낱말카드 30장에 담긴 ‘세움카드’는 학생들이 대화를 쉽게 풀어나가고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도록 돕는다. ‘클로버상자’를 통해선 학생들이 원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을 찾음과 동시에 자기 안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엔 ‘고민이를 구해줘’란 보드게임도 만들었다. 친구들과의 소통을 통해 학생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고민을 해결해주는 협동 게임이다. “한번을 교육하더라도 제대로 된 방식으로 하자”는 고민 끝에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효과도 제법 있었다. 새로운 교육법을 접한 학생들이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기력했던 학생의 표정에 생기가 생겼고,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학생이 의자를 고쳐 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새로운 교육을 가로막는 장벽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일부 학교에선 이제 프로그램을 묻지도 않고 교육을 맡길 정도로 저희를 인정하고 신뢰해요. 하지만 극소수일 뿐이에요. 세움의 교육법을 선뜻 받아들이는 학교는 드물어요.”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각종 기관에서 무료로 자살예방교육을 지원하는데 굳이 예산을 써가며 교육을 맡길 필요가 있느냐”는 거였다. 이를 빌미로 강의비를 깎아달라고 요구하는 곳도 적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학교의 인식이 변하지 않으면 헛수고였다.
하지만 김 이사장은 조급해하지 않는다. “아직까진 자살예방교육에 예산을 많이 투자하고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강의비를 받지 않고 교육을 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그 대신 교육 프로그램이 좋다고 생각이 들면 내년엔 예산을 세워서 제대로 강의비를 달라고 제안하죠. 기회가 늘어나면 좋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세움은 지금도 변하고 있다. 강사들은 꾸준히 멘토링을 받고, 자기계발을 멈추지 않는다. 청소년들의 고민과 문제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다. 김 이사장이 꿈꾸는 세상은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자살예방교육 강사가 설 자리가 없는 세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움을 없애는 게 세움의 목표란 얘기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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